[연예퍼즐] 설리의 극단적 선택, ‘산 자’여 부끄럽지 않은가
입력 2019. 10.16. 00:01:30
[더셀럽 윤상길 칼럼] 자기답게 살려고 몸부림쳤던 배우 설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재능 있는 연예인을 잃어서 안타깝고, 자신에 관한 악플을 스스로 읽게 만들었던 이 자학적인 사회가 밉다. 그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혔는가, 그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이 있는가, 그의 매력 넘치는 삶의 방식을 시샘한 사람은 있겠지만, 그가 누군가를 해코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 사람은 없다. 그는 자기 소신대로 살고 싶었던, 맑은 영혼을 지닌 20대 중반의 젊은이였을 뿐이다.

지난 금요일(11일) 밤에도 JTBC ‘악플의 밤’에서 MC로 시청자를 만났던 설리이다. “스타들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악플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며 올바른 댓글매너와 문화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본다”는 이 프로그램에서 누구보다도 악플에 깊이 또 많이 상처받았던 그는 악플에 대범한 체를 해야 했다. 이 이율배반의 프로그램에서 그가 느꼈을 멍과 고통을 ‘살아남은 자’가 얼마나 짐작할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 이 가학적인 프로그램이 계속 되어야 하는가도 의문이다.

톱스타의 삶에는 보통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그런 '특별한 무게'가 실려 있다. 톱스타의 자리는 늘 고독하다. 이를 두고 대중은 ‘왕관의 무게’를 견디라고 주문한다. “힘들게 스타가 되었는데 그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라. 원하는 것을 얻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톱스타란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받아 보지 못할 많은 사랑을 받는 자리다. 그만큼 선택받은 삶에 대해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톱스타를 꿈꾼다면 그 화려함 속의 고독까지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식이다. 그 무게를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정상급 연예인 중에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고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인들에 따르면 설리도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팬들에게 그들은 선망의 대상이자 꿈을 이룬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스타의 삶이란, 비유하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도 같다. 짜릿함과 공포감이 동시에 춤을 춘다. 인기와 부도 얻지만 심리적 압박감도 크다. 열광하는 팬들도 많지만 악성 댓글도 넘쳐난다.

정혜신 정신과 의사는 그의 저서 ‘당신이 옳다’에서 “이때 '중심'을 잡지 못하면 '죽을 것만 같은' 상태에 빠져든다.”라고 진단한다. 설리의 극단적 선택은 바로 ‘중심’을 잡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다. 그 ‘중심’을 못 잡게 만든 원흉은 ‘악플’이란 괴물이다. 악플러들은 이제 와서 “별생각 없이, 장난삼아서 했던 말인데...”라고 대수롭잖게 반응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배려심 없는 말 한마디에 누군가는 큰 상처를 받는다.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강요할 수도 있다. 이를 ‘그림자 살인’이라고 한다.

설리의 극단적 선택을 반면교사 삼아야 할 때다. ‘인기’란 말 그대로 어떤 대상에 쏠리는 대중의 높은 관심이나 좋아하는 기운이다. 연예인은 인기에만 의존해서 오로지 인기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스타라 하더라도 변화하는 시간 앞에서 인기는 덧없는 실바람이나 물거품과도 같다. 이때의 악플은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한다.

“인기의 상승과 하강에 따른 관심은 독(毒)이 될 수 있다”란 말은 맞다. 연예계에서는 실제로 하늘을 찌를 듯한 대중의 관심(호평)이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지고 난 뒤 악플만이 가득할 때 그 허탈감을 견디지 못해서 삶을 비관하거나 절망에 빠지고 결국은 마약, 혹은 자살의 방법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대중의 관심은 품에 비수를 감추고 있는 배신자의 모습과 같다. 인기가 높았건 낮았건 간에 악플은 연예인의 존재 자체를 허무와 망각의 세계로 완전히 매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동안 설리에게 쏟아진 악플은 “이 사람이 싫다고 하면 저 사람도 싫다”라고 동조하는 형태였다. ‘이런 이유로 싫다’가 아니라 ‘그냥 무조건 싫다’는 내용이다. 설리가 악플에 대해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의 삶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갑’인 악플러 눈에 곱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악플러의 행태는 커뮤니케이션 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노엘레 노이만의 ‘침묵의 나선(螺線) 이론’으로 설명이 기능하다.

이 이론은 “대중은 자신의 의견이 다수와 같으면 적극적으로 나서 목소리를 내지만 소수 쪽일 때는 침묵하거나 다수 쪽으로 의견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플이 악플보다 지배적일 경우, 악플은 점점 더 많아지고, 그에 따라 소수의 의견(선플)은 더욱 더 작아져 여론이 한 쪽으로 쏠리는 나선 모양을 띠게 된다. 주류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와 강자 쪽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이 SNS 등 매스미디어어와 만나 침묵의 회오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악플러가 증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라고 했다. 모두가 한 목소리일 수는 없다. 하지만 악플에도 지켜야할 선이 있다.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 그가 속옷을 입었든 안 입었든 그것이 왜 악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적어도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세월호 단식자 앞에서 통닭을 먹은 사람들’과 다름없다. 설리의 극단적 선택에 ‘산 자’들이 부끄러워야 할 이유이다.

[더셀럽 윤상길 칼럼 news@fashionmkl.co.kr/ 사진=더셀럽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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