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퍼즐] ‘내 나이가 어때서’, 원로 배우들의 용기 있는 도전
입력 2018. 10.08. 09:50:13

한지일 권병길 전유성

[시크뉴스 윤상길 칼럼] 건강하고 중후한 노년의 남성 배우들에게 세월은 견뎌야 하는 야속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감을 쌓아주는 존재다. 어느 세대와 당당하게 경쟁할 역량을 갖춘 이들은 지금 젊은 세대의 롤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70대 남성 배우는 언제나 조연이었고 단역이었다. 누군가의 아버지나 삼촌이나 할아버지였지 주인공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최근 이들은 세상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용기와 연륜을 갖춘 이들은 생활인으로서 당당하게 섰고, 대중예술계에서는 이들의 감성을 존중하기 시작했다.

백발의 원로들이 강한 이유는 이들이 나이보다 젊어 보이거나 젊어지려고 노력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주름과 백발을 당당히 드러낸다. 뒷방에 물러앉은 게 아니라 세상에 뛰어들어 소통하려고 한다. 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열정적이면서 자신보다 덜 산 경쟁자들에게 미소를 보여줄 줄 안다. 조용하고 단단한 이들은 차돌만큼이나 강하다. 영화배우 한지일(71), 연극배우 권병길(72), 희극배우 전유성(70)의 이야기다.

영화배우 한지일은 한소룡이란 예명으로 1970~80년대 스크린을 누빈 스타다. 당대 최고의 미남스타로 대종상 신인상, 남우조연상, 아시아태평양영화제 남우주연상까지 받았던 그가 20년이 지난 2018년, 배우가 아닌 한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충무로에 다시 나타나 화제다. 그는 이곳에서 ‘주임 한정환’이란 이름표를 달고 손님을 맞는다. 한정환은 그의 본명이고, 이 호텔은 그가 수많은 제작자와 영화감독들로부터 출연 섭외를 받고, 선후배동료들과 환담을 나누던 구 아스토리아호텔 자리에 신축 개관한 곳이다. 그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장소이다.

최근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으로 내정된 연극배우 권병길은 동아연극상, 영희연극상, 2010년 최우수예술가상, 2017년 이해를 빛낸 연극인상 등을 수상한 명배우. 하지만 나이 들면서 출연 기회를 얻지 못해 대학로 뒷골목에서 애를 태우더니, 사재를 털고 빚을 얻어 배우 데뷔 50주년을 기념한 1인극 ‘푸른 별의 노래’ (10월 29일~11월 11일 서울 광화문 세실극장)를 무대에 올린다. 열악한 환경과 지원금 없이 모노드라마를 도심의 중극장에서 공연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도전한다.

자타공인 계그계의 대부 전유성은 지난 2007년 경북 청도에 둥지를 틀고 반려동물을 위한 ‘개나소나 콘서트’, 코미디 전용극장인 ‘철가방극장’을 여는 등 활발하게 지역문화 활동을 해왔다. 또한 3년간 ‘청도 세계코미디페스티벌’ 준비 위원장을 맡으며 이 페스티벌을 전국구 행사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지자체로부터 불분명한 이유로 토사구팽 되었고, 그는 전북 남원시 지리산 인근으로 이사하고, 생애 마지막 프로젝트 구상에 들어갔다.

이들의 공통점은 “좌절은 없다”이고 “여전한 현역이다”란 사실이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한국 대중예술계에서도 배우로 산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다. 특히 이들처럼 앞에 ‘원로’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는다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열정이 활화산 같다 할지라도 대중에게 어필할 기회 자체가 그리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정년은 없다.”라고 이들은 말하지만, 출연 기회가 적으니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뒤따른다. 배우로서의 자긍심과 의욕을 지닌 원로들에게 행정적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이유이다.

한지일은 “언제나 배우이고 싶다. 오랜 외국 유랑생활로 영화계와 멀어져 있었던 탓에 이끌어줄 지인이 거의 없어 외롭다”라고 말한다. 권병길은 “소 닭 보듯 하던 지인들이 문화의전당 이사장에 내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친한 척 하는 세태가 싫다”라고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전유성은 지인을 통해 “토사구팽이라고 말들 하지만 어차피 인생은 개판이거나 개그판이다. 내 개그는 현재진행중이다”라며 초연한 입장을 전했다.

이들의 삶의 궤적을 보면, 주변에서의 ‘괴짜’란 표현은 옳다. 괴짜는 항상 우리 곁에 있어 왔다. 우스갯소리로 괴짜에 대한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어, 내 주변에 괴짜가 없으면 내가 괴짜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이 세상 모두가 평범하다면 세상은 무난하게 흘러갈 것이다. 큰 마찰 없이 비교적 평화롭고 조용하게, 한편으로는 심심하게 세상이 굴러갈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평범치 않은, 특이한 행동을 한다면, 그 행동에 의해 세상이 변화할 가능성이 열린다. 원로들의 역할이다.

이들 원로 배우들의 도전에서 발견할 수 있듯, 괴짜는 통념의 틀에서 벗어나 조금은 삐딱하게 세상을 볼 수 있다. 통념이나 관습을 따른다는 것은 사회질서 유지와 안정을 위해서는 좋은 자세일지 모른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을 위한 아이디어 발굴을 막는 장벽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이 당연시 하며 받아들이는 통념이나 질서에 반기를 들고, 잘못된 통념을 깨고자 하는 괴짜들의 시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이렇게 대중예술계는 공력이 쌓인 괴짜에 의해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괴짜들에 의해 문화계의 토양은 변화할 것이다.

세월을 잊은 듯 ‘멈춤’을 모른 채 직진하는 이들 원로들은 “언제나 한계상황을 넘어설 해결책은 있다”란 귀중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왜냐하면 해결책이 없다고 하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무릇 한계란 자신의 마음속에 스스로 그어놓은 선일 뿐,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아무리 어려운 한계상황에서도 해내겠다고 기를 쓰는 사람에게 세상은 그 거대한 몸을 기울여 그 사람이 외치는 소망을 듣고 그것을 들어주려고 힘쓰게 된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결국 복이 온다고 믿는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 우리들은 도전하고 계속 움직인다. 실패도 누군가에게는 귀중한 경험이 된다. 한지일, 권병길, 전유성, 이들 원로 배우들의 소리가 들린다. “실패에 감사하면서 또 다른 문을 열어보자. 나이든 자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육체의 쇠약이 아닌 정신의 고정 관념과 편견이다”. 바람에 말리고 세월에 삭혀낸 진한 시래기 국물 맛 같은 소리다.

[시크뉴스 윤상길 칼럼 news@fashio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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